2011/12/03 18:22

제3장 - 플라톤 > 1.플라톤의 생애 소크라테스 to 포스트모더니즘

플라톤의 광범위한 지식 체계는 매우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서 가장 지속적인 흐름을 형성해 왔다. 한 가지 문제에만 집중했던 그 이전의 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은 인간 사유의 모든 영역을 하나의 일관된 지식 체계로 포섭했다.

플라톤은 우리의 목전에 펼쳐지는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상식적인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 수많은 사물들의 이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정신은 우선 물질적인 사물들이 움직이는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플라톤은 깨달았다. 그것은 사유 및 이데아들의 세계, 과학의 세계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물질적인 사물들은 정신을 물리학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에 대한 지적 이해가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1)사물들의 활동ㅡ개별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유사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물들ㅡ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신은 우선 그 사물들이 그것들의 활동에서 준수하는 원리들과 규칙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2)또한 수학은 개별적인 것과 연결되지 않고도 사유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 물리학이 가시적 사물들의 위에 혹은 배후에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로의 정신의 유입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면 이 단계에서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은 이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하는가' 또는 '실재하는가'의 문제다. 실로 상식과는 반대로 플라톤은 가장 실재적인 것이 바로 이 이데아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이 두 세계를 혼동한 데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현상계가 속견만을 낳는다면 초시간적인 이데아들은 참된 지식을 산출할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인식론은 형이상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확고한 다리를 놓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만일 우리가 사물의 참된 본성인 실재ㅡ인간의 참된 본성을 포함하는ㅡ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대한 근본적인 실마리를 동시에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소크라테스의 "지는 덕이다."와 일맥상통한다. 만약 '참'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이 요구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참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러한 인간의 관심은 윤리학, 정치학, 종교라는 세 가지의 분리된, 그러면서도 서로 연관된 분야들에 의해 취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구인의 정신을 형성했다. 서구 문명의 도덕 철학과 과학적 전통은 본질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이 이룩한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플라톤의 생애
플라톤은 기원전 428년(또는 기원전 427년)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마흔두 살이었고 아테네의 문화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플라톤의 가문은 아테네의 저명한 가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정치학, 철학 등 다방면에서 그 문화를 두루 섭렵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한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플라톤이 공공 생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이미 어린 나이에 정치적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 자신이 목격했던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민주제도로는 위대한 지도자를 낳을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와 같은 가장 위대한 시민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아테네의 붕괴와 그의 스승의 사형은 민주제에 대한 절망감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따라서 그는 권위와 지식이 적절히 배합된 정치 지도자의 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선원의 권위가 항해에 대한 그의 지식에 근거하듯이 국가라는 배는 그에 걸맞는 적합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운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국가론>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팽배했던 다양한 형태의 철학을 두루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소크라테스의 일생과 가르침이었다. 플라톤에게 철학이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문화된 기술적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방식이었다. 철학은 과학과 인간 행동의 영역에 공히 적용되기 때문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풍성도 요구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철학적 활동, 즉 정신의 부단하고 정열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 자신을 세계에 관련시킬 수 있고 전인적인 힘과 능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역시 완전한 지식이나 절대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식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변증술이라는 확신만을 가지고 있었다.』→ [변증술은 오늘날에는 토론이 되었으며 '주장-비판-대안'이라는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사유과정을 통해 더 이상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주장이 완성되었을 때, 이것은 변증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상인 '완전한 지식'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387년경 그의 나이 약 40세였을 때, 플라톤은 아테네에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아카데미아는 서구의 역사에서 최초로 출현한 대학이었다.

플라톤의 주요 관심은 미래의 지도자들의 교육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은 엄격한 지적 훈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플라톤은 그들에게 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을 포함한 과학적 탐구 방식을 교육했다. 플라톤이 교과 과목의 중심에 둔 것은 수학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준비를 그는 진리나 과학적 지식의 사심 없는 추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속견과 감정을 배제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하며 엄격한 사유를 통해 실재를 직시하고 지식에 입각해서 판단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플라톤에게 정치적 환멸을 깊게 느끼게 했고, 이러한 이유로 그는 공익을 위한 정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엄밀한 지식이야말로 지배자의 훈련을 위해 가장 적절한 것임을 가르치기를 계속했다.

플라톤은 만년까지 끊임없이 저술하면서 아카데미아에서 활동하다가 기원전 318년(또는 기원전 347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플라톤의 강의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그의 수강자들의 노트만이 전해질 뿐이다. 기원전 367년 18세 때에 아카데미아에 들어간 아리스토텔레스가 거기서 플라톤의 강의들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20년이 넘는 철학적 대화편들을 작성했다. 학자들은 이러한 대화편들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 논쟁 중이지만 일반적으로 세 부류로 대화편들을 나눈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윤리학에 집중됐고, 두 번째 시기의 대화편들은 이데아론과 형이상학이 제시되며, 일생의 후반의 저작들은 자연의 구조를 다룬 기술적인 대화편을 저술했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주제에 관해 서술했다고 해서 그 주제에 관한 그 이후의 논의의 여지를 없애지는 않았다.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는 그의 대화편들은 그의 지적 발전 과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가 많은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법에서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년월일/시계

통계 위젯 (블랙)

11
10
7617

다음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