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08 18:45

제3장 - 플라톤 > 2.인식론 > 2-③.형상론 소크라테스 to 포스트모더니즘

형상이나 이데아는 불변적이고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본질로서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그것의 조잡한 모사에 불과하다. '삼각형'이라는 형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삼각형은 단지 그 형상의 모사에 불과하다. 비물질적인 실재로서 형상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플라톤의 이론에 있어서 매우 새로운 면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실재를 몇 가지 종류의 물질적 재료로 생각했던 반면에, 이제 플라톤은 비물질적인 형상이나 이데아를 참된 실재로서 내세웠다.』→ [예컨대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생각했고, 피타고라스는 숫자라고 생각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는 많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은 물질적인 질서가 항상 유동하고 변화한다는 이유에서 지식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플라톤은 지식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질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형상론은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존재에 관한 의문을 일으키는 몇 가지 경험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아름답다고 말하거나 어떤 행동을 선하다고 말하면서 사물과 행동에 관한 판단을 한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고 있는 사물과 별도로 존재하는 선의 표준이 어디엔가 있음을 암시하며, 우리가 판단하는 인간이나 그 인간의 행위와 어느 정도 분리된 선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선이나 미(美) 같은 이데아들은 영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실재적인 세계는 가시계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계라고 결론 짓는다. 플라톤에 의하면 가지계는 영원한 형상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장 실재적인 것이다.

2-③-가.형상이란 무엇인가?
형상이란 영원한 패턴이며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들은 단순한 모사들에 불과하다. 어떤 아름다운 인간은 보편적인 미의 모사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인간은 많든 적든 이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인물을 통해 아름다음을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제한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 우리는 곧 "어떤 형태의 아름다움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물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의 결과로서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완화되면서 아름다운 물질적 대상에서 미의 개념으로 옮겨가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미의 이러한 보편적 성질을 깨닫는다면 "한 가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극렬한 사랑은 시들게 되고, 그는 그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간주할 것이며… 모든 아름다운 형상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는 미의 광활한 바다로 들어가 그 속에서 관조하면서 지혜에 대한 무한한 사랑 가운데서 참되고 고귀한 사상과 관념을 수 없이 창조해낼 것이다. 해안에 도달할 때까지 그는 점점 더 성장하고 강해져 결국 그의 시야에는 단 하나의 과학이 펼쳐질 것이다. 이것이 곧 다음 아닌 미의 과학이다." 즉, 아름다운 사물들은 그것의 다양성 속에서도 모든 미의 근원인 미의 이데아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사물들은 아름답게 '된다'. 그러나 미의 이데아는 항상 '그러하다'. 따라서 미의 이데아는 자신의 안팎으로 움직이는, 변화하는 사물과 별도의 존재를 갖는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이 정의인가 또는 무엇이 미(美)인가를 물을 때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물들의 예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알기를 원한 것은 무엇이 이 사물들을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느냐는 점이다. 속견과 지식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속견의 수준에 있는 자는 정의로운 행동을 알 수는 있지만 왜 그것이 정의로운지는 말할 수 없다. 지식은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들과 사실들, 즉 생성의 영역과 관련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 존재를 지닌 것은 사물의 본성이며 보편의 미나 선과 같은 본질들은 우리가 무엇이 선하다든가 아름답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영원한 형상이나 이데아들이다.

미와 선의 형상 이외에도 다른 형상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과연 본질이나 본질적 속성들이 존재하는 수만큼 많은 형상들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비록 플라톤이 개(犬), 물(水), 그 밖의 다른 사물의 이데아나 형상이 존재한다고 확언한 바는 없지만 <파르메니데스>에서 진흙과 먼지의 이데아들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모든 종류의 사물의 배후에 형상들이 존재한다면 일종의 중첩된 세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얼마나 많은 형상이 존재하는가 또는 어떤 형상이 존재하는가를 세밀히 밝히려 할 때 이러한 난점들이 증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형상을 통해 의도하려 했던 바는 명백하다. 그는 형상들이 영원한 존재를 가지며 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 파악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이라고 생각했다.

2-③-나.형상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만일 형상들이 정말 실재하며 존재를 체현한다면 그것들은 어디엔가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가장 명백한 제안은 형상들이 구체적인 사물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떨어져' 있거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형상이 하나의 독립적 존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비록 특정한 사물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존재한다. 형상들은 차원을 갖지 않는다. 그것들의 위치에 관한 의문은 형상도 어떤 것이므로 공간의 어딘가에 위치해야 한다는 우리의 언어의 결과다.

2-③-다.형상과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
형상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사물과 관련되며 이는 동일한 사항에 관해 언급하는 세 가지 방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 형상은 사물의 본질인 '원인'이다. 둘째, 사물은 하나의 형상을 '분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사물은 하나의 형상을 모방하거나 '모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가 분리될 수 없으며 실재적인 선과 미는 현실적인 사물들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사물과 분리된 형상의 존재를 설명하는 어떤 일관된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그렇지만 플라톤은 만일 정신이 불완전한 사물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접근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의 불완전성에 관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반문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들 "인간은 불완전하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는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인간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③-라.형상들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플라톤은 "우리는 형상을 함께 엮음으로써만 언설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어두움, 아름다움, 인간 등의 구체적 사물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형상과 형상을 관련시키는 일도 한다. 우선 동물의 형상이 존재하며 그것의 속류로서 인간과 말의 형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형상들은 서로 류의 종의로 관련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형상은 그들 나름대로의 단일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얽혀 있다. 동물의 형상은 말의 형상에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한 형상은 다른 형상을 분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구조를 나타내는 형상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그 가운데 가시계는 단지 하나의 반영에 불과하다. 이 형상의 위계질서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형상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지식은 점점 더 넓어진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즉 그것은 특정한 경우들과 특정한 사물들로부터 그러한 독립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것은 최고 형태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플라톤이 모든 형상이 서로 관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의도는 모든 의미 있는 언명이란 형상의 사용과 연관되어 있으며, 지식은 적합한 형상의 상호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 것일 뿐이다.

2-④-마.우리는 어떻게 형상을 인식하는가?
플라톤은 정신이 형상을 발견하는 방식을 최소한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상기'의 방식이다.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이미 형상과 친숙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들의 정신이 존재의 선험적 상태에서 인식했던 것을 상기한다. 가시적 사물들은 인간에게 이미 알고 있던 본질들을 상기시킨다. 실재로 교육은 상기의 과정인 것이다. 둘째, 인간은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형상의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데, '변증법'이란 사물의 본질을 추상화하는 힘이며 지식의 모든 부분들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힘이다. 셋째, '갈망'의 힘, 즉 '사랑'(eros)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향연>에서 서술했던 대로 인간을 아름다운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운 사유로, 더 나아가 미의 본질 바로 그 자체로 단계적으로 나아가게 한다.

형상론은 인간 지식에 관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만, 그것은 또한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의문들을 남겨 놓고 있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두 개의 분리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지만 이들 세계 간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가치 판단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사물이 더 좋다든가 더 나쁘다는 표현은 가치 평가를 받고 있는 그 사물들 속에 명백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기준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형상론은 과학적 지식을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실제로 현실적인 가시적 개별자들을 '초월'해서 본질이나 보편과, 즉 '법칙'을 다루기 때문이다. 비록 이 형상론의 전 체계는 궁극적 실재가 비물질적이라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관점에 의존하지만, 그것으 결국 어떻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담화할 수 있는가 하는 좀 더 단순한 사실에 대해 설명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플라톤의 표현에 따르면 대화는 우리를 형상으로 이끄는 단서다. 왜냐하면 대화는 보는 것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눈은 단지 특정한 사물만을 볼 수 있지만 대화에 생명을 불어 넣는 사고 작용은 보편적인 것, 즉 형상을 '파악'함으로써 특정한 사물을 떠나게 된다. 결국 플라톤의 이론에는 비록 이론이 불확정적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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